그러나 정말 이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나이가 들어도 객관적인 사항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편가르기에 눈 먼 호모사피엔스일뿐이었다.
나이를 먹어가며 얻은 경험적인 학습효과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며
판사, 변호사, 심지어는 오랫동안 교육계에 몸담아 왔던 교육인들까지 이 범주에서 벋어나지 못하고 행동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게다가 돈에 충실히 충성심을 보이는 00사들을 보며 참으로 안타까운 인생이구나 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들에게 인류 역사이래의 학습효과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희망은 그저 희망사항이었을 뿐!!
심지어 그들은 개관적인 사실이 주었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태도를 변명하고 합리화하기에 급급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불법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하였고 인간본성까지 버리는 심각한 행동을 저지르기까지 하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색깔 모자를 썼느냐가 중요할 뿐이었다.
뇌와 행동에 대해 적어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내부의 생물학적 힘에 좌우되는 비율이 선을 넘어서고 우리가 이성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무시할 때 인류는 가장 비참해 진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저지른 비참한 결과를 생각할 마인드 자체가 없는 듯 하다.
이 정도 상황까지 오면 전부 다들 심각한 폭력범으로 실형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일까?
꼭 현실이 되어도 뉘우치지 않겠지만 현실화 시켜줄 필요는 있을 듯 하다 라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원칙대로 진행하기에는 난 물러터진 인간이다.
다음 기사는 문명인이라고 불리우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http://kr.wsj.com/posts/2014/08/29/분노의-시대-공감은-분노를-부채질한다/
퍼거슨에서 가자지구에 이르기까지, 올 여름은 실로 ‘분노의 계절’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분노하는 정도는 그들이 어느 편에 속해 있느냐에 달려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10대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퍼거슨 사건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백인보다 훨씬 많다.
하마스의 로켓이나 이스라엘의 공격에 얼마나 분노하는가 역시 자신이 이스라엘에 공감하느냐 팔레스타인에 공감하느냐에 달려있다. 실제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이 같을 때조차 그렇다.
당신은 이런 시각이 역사와 문맥의 문제라고 여길지도 모르며,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국립과학원회보’에 실린 최근 연구는 이런 시각이 인간의 본성을 반영할지도 모른다고 시사한다. 어린 아이들조차 부당한 행위의 주체가 ‘그들’이고 객체가 ‘우리’일 때, 즉 자신이 당하는 편과 같은 입장일 때 더 분개한다. ‘그들’과 ‘우리’를 나누는 기준이 쓰고 있는 모자 색깔처럼 거의 무의미한 것이라해도 마찬가지다.
하버드대 연구진 질리안 조던과 캐슬린 맥컬리프, 펠릭스 워네킨은 이코노미스트와 혁명적인 생물학자들이 “손실이 큰 3인칭 기준위반 처벌”, 우리 같은 범인들은 “의로운 분노”라 부르는 것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을 보면 당연히 그 사람을 벌할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다소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말이다.
순수하게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알쏭달쏭하다. 분노한 사람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에 공평성을 주입하면 사회적 협력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된다. 게다가 우리 인간은 가장 협력을 잘 하는 영장류다. 그렇다면 분노는 자연스럽게 개발되는 걸까, 아니면 학습으로 터득하는 걸까?
연구진은 실험에 참여한 6세 아동들에게 사탕을 나눠주었다. 사전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한 후다. ‘조니와 헨리라는 두 아이가 사탕 나눠먹기 게임을 했다. 조니에게 사탕 6개가 있는데 헨리에게 몇 개를 줄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조니는 사탕을 공평하게 나눌 수도 있고 혼자 독차지할 수도 있었다.’
연구진은 아이들에게 두 가지 옵션을 주었다. 레버를 녹색쪽으로 당기면 조니와 헨리가 사탕을 그대로 가지게 될 뿐더러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빨간색쪽으로 당기면 조니의 사탕 6개는 모두 날아가고 아이들도 자신의 사탕을 잃게 된다. 조니는 벌을 받게 되는 것이고 아이들 역시 손해를 보는 것이다.
실험 결과 조니가 사탕을 공평하게 나눴을 때 아이들은 레버를 녹색쪽으로 당겼다. 하지만 조니가 이기적으로 굴었을 때 아이들은 마치 자신이 분노한 것처럼 행동했다. 빨간색쪽으로 레버를 당긴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자신 역시 사탕을 잃게 되는데도 말이다.
어느 편에 속하느냐가 아이들의 판단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연구진은 아이들에게 팀을 선택하도록 했다. 파란팀은 파란 모자를, 노란팀은 노란 모자를 썼다. 연구진은 조니와 헨리가 파란팀과 노란팀 중 어느 한 팀에 속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팀 결정은 100% 임의적이었다. 독기 서린 과거도 분쟁의 역사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조니가 다른 팀에 속했을 때 그의 불공평함을 벌하는 확률이 높았다. 피해자인 헨리가 자기 팀에 속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우리’보다 ‘그들’에게 더 분노한 것이다. 소름끼치는 결과지만 다른 연구와도 일치한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일찍부터 도덕성의 양대 기둥인 관용과 정의에 대한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처음부터 관용과 정의를 자기가 속한 집단에게만 베푸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희망의 빛줄기도 보였다. 8세 아동들의 경우 자기 팀에 편향적인 면은 같았지만 6세들보다는 정도가 덜했다. 그들이 도덕성을 감안하는 범위는 이미 같은 모자를 쓴 사람, 그 이상으로 넓어진 듯 했다. 결국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성장할수록 그 범위가 점점 넓어져 성인이 되면 우리 모두가 그 안에 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사 번역 관련 문의: jaeyeon.woo@wsj.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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